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이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주관하는 2021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밤의 여행자>들을 모르던 독자들도 이 기회에 작품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수상의 장점 중 하나다. 책의 3분의 1 가량을 읽었을 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내가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니......'하고 1차로 놀랐고, 2013년 출간작이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오랫동안 모르다니......'하고 2차로 놀랐다.
줄거리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는 재난 여행 상품만을 판매하는 여행사 '정글'이 있다. 이 소설은 정글의 수석 프로그래머 고요나가 사막의 싱크홀 '무이'로 떠나 엄청난 프로젝트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무이'를 떠나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우해 공항으로 가던 중 일행에서 낙오된 요나는 일행들과 묵었던 리조트 '벨 에포크'로 돌아간다. 그곳의 리조트 매니저의 부탁을 받고 퇴출 위기에 놓인 무이를 되살리기 위한 인공 재난 시나리오에 동참하게 된다.
감상
재난 관광이라는 소재에서 이미 어떠한 기운이 느껴졌다. 재난을 관광화하려면 고통을 전시해야 하고, 재난을 소비하는 사람은 그 고통과 거리가 먼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이 된다. 또한 매력적인 소비 상품이라면 고통은 지속적으로 형태를 바꾸거나 정도가 심화되어야 한다.
직접 읽어 본 소설은 그것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 시스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어느 순간 인간은 기계 장치의 한 부품이 되어 버렸는데, 왜 내가 부품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는 대신, '나는 누구보다 뛰어난 부품이다'를 증명하는 쪽으로 선회해 버렸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점,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의 이야기로 잘 버무려서 만든 글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
p. 61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 ->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p.55
"하긴 먼 데서 재난을 찾을 것도 없네요. 우리나라도 이제 쓰나미 안전지대가 아니라니까요."
"남해안 일대가 초토화되었더라고요."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요?"
어느새 돌아온 교사가 그렇게 물었다.
"너무 가까운 건 무섭거든요. 내가 매일 덮는 이불이나 매일 쓰는 그릇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더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요나의 말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듯했다.
p.120
"무이에서는 더 이상 상식으로 기다리는 방식이 안 통합니다. 재해 때문에 죽나, 가만히 앉아 굶어 죽나 똑같지 않나요.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재해 쪽이 낫지요. 정글과 계약해서 리조트를 세운 이래로 무이는 그 역할대로 일상을 재단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외지로 빠졌던 젊은 인력들이 돌아오기도 했지요. 이제 와서 그 역할이 없어진다는 것은 삶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p.145
재난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느 각도로 칼을 들이대도, 누구나 감동하고 슬퍼할 만한 재난의 단면들이 나타나도록 고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동공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강렬한 이미지다. 특히 매스컴으로 재난을 마주하는 경우, 이미지가 재난의 실체를 지배한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규모로 터진 몇 건의 재난을 보면, 피해 규모와 성금 혹은 관심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도시는 뉴스 몇 줄을 장식하고 금세 잊히는가 하면, 또 어떤 도시는 보다 농도 짙은 관심과 많은 성금을 얻었던 것이다. 그건 폐허가 된 도시를 잘 녹여낸 몇 장의 사진과, 그 사진의 주석 같은 사연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기에 더 슬프고 돕고 싶은 쪽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되려면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가 드러나야 하고, 가장 좋은 건 피폐한 삶 속에 공감하는 경우였다.
p.155
실질적으로 이 계획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단 세 명이었다. 매니저, 작가, 그리고 요나. 그러나 저 구덩이를 파고, 이 일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증언할 사람들까지 헤아리면 이미 수백 명에 이른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작가와 요나만 입을 다물면 이 사건에 대해 떠들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은 분업화된 시스템 때문에 아주 부분적으로만 이 일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구덩이를 파는 사람도 이것이 어떤 일에 사용되는 구덩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화장터에서 시체를 냉동고에 넣는 사람들은 시체를 냉동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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