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작가의 매력적인 글쓰기
김혼비 작가는 유쾌함이 매력이다. [아무튼 술], [호쾌하고 우아한 여자 축구], [전국 축제 자랑]에서 그 매력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 책 역시 김혼비 작가의 매력을 이어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전 작품보다 조금 더 진중하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는 김혼비 작가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 운동하러 가서 생긴 일 , 그 외 사소할 것 같은 순간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우리가 질색을 하며 피하는 '꼰대'라던가, 앞에서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지만 정작 행동은 형편없는 가식적인 사람의 '위선'. 나쁘다고만 생각한 사람의 모습을 한 번 비틀어서 새롭게 정의한다.
꼰대를 피하려다 꼰대가 되어버리는 슬픈 굴레
누구나 꼰대를 싫어한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남발하여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꼰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꼰대 싫어", "꼰대 사절"을 대놓고 내세우던 작가는 어느 날 깨달는다. 오지랖 속에 끼어 있던 유용한 조언과 충고조차 자신에게 사라졌음을. 게다가 나이가 들고 직급이 높아지자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급격히 줄었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자란 사람이 과연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조자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경험을 과잉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새로운 꼰대가 된 그들은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충조평판을 남발하며 오지랖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꼰대가 싫어서 피하다가 자기가 꼰대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가식은요, 그래도 좋은 거예요.
솔직하다는 착각에 폭언을 일삼는 사람(위약)과 실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올바른 척하는 가식적인 사람(위선) 중 그래도 가식이 낫다고 한다. 가식적인 사람은 최소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선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식은 선으로 가는 중간 단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뜻과 다르게 행동하지만 행동이 지속되면 그게 몸에 배게 되고, 그런 사람이 된다. 커닝 페이퍼를 만들다가 진짜로 시험을 잘 봐버렸다는 일화처럼 말이다. 우리의 위선이 커닝 페이퍼의 핵심 내용을 열심히 베끼는 행동이기를. 그래서 커닝 페이퍼 없이도 스스로 뿌듯한 결과를 얻기를 바라본다.
책 속 문장
p.54
이런 '현대인의 위선과 가식을 까발린다!' 유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위선을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서 도마 위에 올려놓은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아니, 아마도 의도와는 정반대로), 모두가 위선을 부리고 있는 상황이 사실은 얼마나 바람직한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역설 말이다. 뜻하지 않은 '위선 권장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자신과 타인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혀 결국 파국을 맞는 순간은, 사람들의 위선이 벗겨진 순간, 그러니까 누구도 더 이상 위악을 부리지 않고 있으며, 부릴 의지도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끝까지 약자를 배려하는 척, 정의로운 척 위선이라도 부렸더라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넘어갔을 일이, 꼭 위선을 벗는 바람에 큰 문제가 된다.
누군가는 위선을 긍정할 게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삶에서 위선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지 않겠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세상이 과연 살 만한 곳일까? 위선 없이도 늘 선을 행할 수 있는, 순도 100퍼센트의 선과 완벽하게 완성된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딱히 성악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본심 속에는 수많은 균열이 있기에, 어쩌면 '위선이 사라지고 인간의 솔직한 본심만이 남은 세상'은 형용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심만이 남았을 때 세상은 붕괴되고 말 테니까.
p.57
위선과 위악은 간단히 나눌 문제가 아니지만 (일단 무엇이 선익 무엇이 악인가를 철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된 선과 악의 개념을 차용해보면), 위선이 위악보다 나았던 이유는, '선을 위조한다는 것
은 적어도 위조해야 할 선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기에 가능한 것이라 상대와 '선'에 대해 따로 합의할 필요 없이 엇비슷한 선상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다. (중략)
반면, 선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설령 안다 한들 그것을 위조라도 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고(그렇다. 선을 위조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런 포장 없이 자신의 마음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솔직함의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과는 일단 말부터가 통하지 않았다. 서로 윤리관이 전혀 달랐다.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볼 때마다 가끔 나는 '위악'이라는 말이야말로 위선적으로 느껴지곤 했는데, 어떤 의도에서든 바깥으로 방출하는 행동이 '악'이라면 그건 그냥 '악'일뿐인 것을, '위악'이라는 말 뒤로 숨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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