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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고전 파헤치기 - 지도자의 자질 [군주론]

by 캉쓰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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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따서 생긴 용어이다. [군주론]은 아직까지도 정치계 바이블로 불리며 수많은 정치가와 사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어떤 책이길래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일까?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의 그림.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에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1469년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귀족 가문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7세 때부터 라틴어를 배워 고전을 읽었고,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의 글을 탐독했다. 1498년 6월에 피렌체 공화국 서기가 되어 외교 업무를 담당한다.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지역에 파견되어 정치 권력가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된다.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이 몰락하고 메디치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자 공직에서 쫓겨난다. 이듬해 반란 음모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사면 후 집필에 몰두하여 [군주론]을 비롯한 책을 완성하였다. [군주론]은 다시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27년 6월 급성 복막염으로 사망한다.

 

 

[군주론]이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쓴 정치사상서이다. '군주국이란 무엇인가', '군주국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떻게 획득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잃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513년 7월에서 12월 사이에 초고를 마무리한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이 책을 헌정하였다.

 

[군주론]을 이해하기에 앞서 당시의 시대상을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1291년 십자군 전쟁 종결 후 300여 년간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 국가 내의 로마, 피렌체, 나폴리 등의 도시가 당시에는 엄연한 하나의 국가였다. 1434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가 권력을 잡은 이후 4대에 걸쳐 60여 년간 피렌체를 통치했다. 국가 원수의 공식적인 지위는 갖지 않은 참주 정치의 형태다.

*참주 정치: 하층 민중의 지지를 얻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독재 정치를 펴는 것.

 

바야흐로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며 오스만튀르크가 새로운 제국을 형성한다. 에스파냐는 1492년 파견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고, 포르투갈은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새로운 인도 무역 항로를 개척한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며 지중해에 기반한 이권이 대서양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세력은 지고 대륙 영토 국가의 힘 커지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문제점은 르네상스 시대의 현상 유지에만 머물러 새 시대에 대한 대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492년 ‘위대한 자’ 로렌초가 죽으면서 상황은 나빠진다. 1494년 11월 9일,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피렌체를 공격하여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다. 이에 피렌체는 공화정 체제로 전환하는데 이때 마키아벨리가 서기로 발탁되어 공직에 몸을 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화정 체제 안에서도 상황은 안정되지 않았다. 내부 분열이 극심하였고, 자체 군대 없이 용병에만 의존한다는 맹점이 있어 자주권을 지키기 불안한 상황이었다. [군주론]에서 자국 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1512년 메디치 가문이 힘을 키워 돌아왔고, 피렌체는 공화정에서 다시 군주정으로 돌아왔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 반역에도 연루되어 고초를 당한다. 불안정한 정치가 미치는 악영향을 몸소 체험한 마키아벨리는, 어떤 정치 형태가 바람직한가에는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정권이 안정되어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 보았다. 당시 군주정이었기 때문에 [군주론]을 집필했던 것이고, 만일 공화정이었다면 [공화론]이 나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인물을 알면 [군주론]이 보인다.

[군주론]에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인물이 있다. 체사레 보르자(1475~1507)다.

 

발렌티노 공작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는 영토를 획득하여 군주가 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작용한다고 했다. 행운(포르투나)와 역량(비르투)다.

체사레 보르자는 태생부터 행운이 작용한 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교황이 되는 알렉산데르 6세로, 아버지의 정치적 야심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힘으로 발렌티노 공작의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행운으로 얻은 것은 조력자가 힘을 잃으면 금세 빼앗기고 만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을 타계해 나갈 역량이 필요하다. 행운으로 얻은 지위를 지켜나가는 체사레의 방식을 마키아벨리는 높이 샀다.

무력을 얻는 법

체사레는 프랑스 왕과 용병인 오르시니의 군대의 힘을 빌려 로마냐 지역을 차지한다. 점령지를 유지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는다. 용병 군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며, 프랑스의 왕도 지금은 호의적이지만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체사레는 다른 사람의 군대와 행운에 의지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용병 대장들을 죽여 군대를 해체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했다. 또한 큰 세력인 오르시니 파와 콜론 나파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추종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재물을 넉넉히 주고 지위에 따라 관직을 부여했다. 수개월 만에 추종자들은 체사레를 지지하는 충성 세력이 되었다.

마키아벨리 曰: 타국의 군대와 용병의 힘을 빌리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민심을 얻는 법

새로 획득한 로마냐 지방은 백성들을 약탈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무능한 영주들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단결시키기보다는 분열시켜왔으며, 도둑이 들끓고 분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지역을 평화롭게 만들고 새 통치자의 법률에 복종하게 하기 위해 레미로 데 오르코라는 인물을 파견한다. 실력이 출중한 레미오는 전권을 얻게 되자 가혹하지만 효과적으로 지역을 평화롭고 단결된 지역으로 만든다.

군주 입장에서는 이제 두 가지 문제만 남았다.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압박한 불만을 잠재우는 일과 힘이 커진 부하를 억제하는 일이다. 체사레는 한 가지 방법으로 두 문제를 해결한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레미를 공개처형한 것이다. 그동안의 가혹한 통치는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 전권을 위임받은 레미로의 독단이었을 뿐이며, 자신은 백성들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부하를 미리 없애버린 행동이었다. 백성들조차 이 행동에 다소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 曰: 사람들을 다룰 때는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거나, 철저히 제거하라.

행운이 사라졌을 때 스스로 강해지는 법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비호에 힘입어 세력을 확장하던 체사레는 불과 5년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이한다. 새 교황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경우 획득한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네 가지 대책을 마련한다.

1. 자신이 빼앗은 지역의 영주 혈통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새 교황이 그들에게 돌려주지 못하도록 한다.

2. 로마 귀족의 호감을 사서 새 교황을 견제한다.

3. 추기경단을 최대한 자기세력으로 만든다.

4. 공격을 받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이 중 세 가지는 완수하였고, 네 번째도 거의 완수하였다. 귀족의 호감을 샀고, 견제 세력은 화해를 청하는 척 불러들여 모두 살해했다. 추기경단도 매수하여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출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뽑히지 않게 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가 예상 못 했던 한 가지는 자신의 건강이 나빠질 거라는 예측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린 체사레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는 했으나 새 교황 선출 과정에 결정적인 손을 쓸 기회를 잃어버린다. 그 후 새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쫓겨 체포와 탈출을 거듭하다 1507년 사망한다.

마키아벨리 曰: 비록 실패하였으나 타인의 무력과 행운으로 통치권을 얻은 사람이 모방할 표본을 제시하였다.

 

나라를 구하기 어렵다면,

악덕을 행함으로써 오명을 무릅쓰는 일이 있더라도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지성 [군주론]

[군주론]에 대한 엇갈린 평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을 요약한 금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비열하고 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며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했다는 호평이 있는 반면, 정치적 기회주의라는 비판적 해석 또한 존재한다.

버트런트 러셀은 중립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군주론에서 주장한 것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획득하고 싶으면 '냉철'해져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즉, 정치를 분리시켜 본 것일 뿐 부도덕한 시점에서 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군주론] 제5장에서 공화정 체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그 시절을 잊지 않으며 언제든 자유로 회귀하려 하기 때문에 철저히 단속하라고 한다. 이에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왕을 가르치는 척 가장하면서 실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

[군주론]을 읽은 감상과 개인적인 견해

대선을 앞두고 통치자의 자질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독서모임 지정도서로 정해졌고, 다시 읽게 되었다. 몇 년 전에는 돋을새김 판본으로, 이번에는 현대지성 판본으로 읽었다. 두 판본 모두 잘 읽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해도 무관하다.

지도자의 도덕적 자질과 정치적 수완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에 판단에 좌우된다. 마키아벨리는 버트런트 러셀의 말처럼 그 둘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한다.

싸움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상식과 도리를 지키면서 하는 인간의 싸움과 앞뒤 가리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짐승의 싸움 방식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두 가지를 잘 섞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말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지는 살면서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방법도 쓸 수 있다'고 마음먹고 행동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제18장에서는 '자신이 불리하다면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약속이 깨지는 결과는 동일하다고 해도 '나한테 불리하면 언제든지 약속을 깨야지' 마음먹은 결과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생긴 결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호의를 베푸는 척 사람들을 초대하고 학살한 체사레의 방식을 훌륭하다고 소개하였으나 이것은 선의가 기반이 되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비겁한 방법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선의는 존재하지 않다고 믿으며, 서로 의심하는 사회라면 그가 말하는 짐승의 싸움 방법이 가능하기는 할지 의구심이 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25장의 행운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간사는 노력하면 노력한 대로 이루어지는 정직한 곳이 아니다. 어떤 이는 운이 더 큰 힘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스스로의 역량과 행운이 어느 비중으로 차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둘이 함께 존재해야 함은 분명하다. 마키아벨리는 이 둘을 강조하면서 시류에 맞게 행동을 바꾸는 적극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조심스럽고 참을성 있게 행동하는데,

시대와 상황이 그의 행동 방식에 어울리게 돌아간다면 그는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시간과 상황이 달라졌을 때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지성 [군주론]

 

 

과거 성장기에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각광받았다. 그 방식이 독선적이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해도 결과가 좋다면 얼마든지 용인되었다.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새로운 리더가 각광받는다. 예전처럼 매일 야근을 시키고 주말에도 개인적인 용무로 불러내고 복종하는 자세를 요구하는 리더는 모두의 비난을 받는다. 이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과거에는 자신을 칭찬하지 않았던가? 뭐가 문제인가' 하고. 시간과 상황이 달라졌을 때 그에 맞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면 몰락할 것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기민하게 사회가 돌아가는 방향을 지켜보고 자신을 함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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