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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마술적 리얼리즘, 칠레의 시대를 담은 소설 -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

by 캉쓰 2022.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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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는 칠레의 수상을 지낸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다. 군부 독재로 인해 베네수엘라로 망명 생활을 하였다. <영혼의 집>은 외조부의 병세가 위독해진 데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자신의 가족사를 변형시켜 4대에 걸친 가족의 삶을 통해 칠레의 현대사를 심도 있게 비추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현대 소설의 큰 줄기인 마술적 리얼리즘과 페미니즘을 잘 결합시켜 포스트붐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줄거리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칠레의 20세기를 담은 책이다.

이야기는 델 바예 가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치에 입문하려는 세베로와 여권 신장에 힘쓰는 니베아 부부는 열한 명의 아이를 가진 부부다. 그들의 막내딸 클라라는 신묘한 능력이 있는데 물건을 두둥실 떠오르게 하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것 등이다. 예지력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겨서 역사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어릴 때 겪은 충격적인 일로 인해 9년간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아버지 대신 독살당한 불운한 언니 로사의 부검 장면을 본 것이다. 모두가 목소리를 듣기를 체념했을 때 클라라가 입을 열었다.

 

"난 곧 결혼할 거예요."

클라라가 말했다.

"누구랑?"

아빠가 물었다.

"로사 언니의 약혼자랑요."

 

죽은 로사 언니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에스테반 트루에바. 몰락한 상류 가문에서 태어나 로사와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고된 노동을 견뎌내던 그는, 로사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도시 생활을 저버리고 시골로 내려간다. 황무지처럼 버려진 자신의 영지 '트레스 마리아스'. 그곳을 일구며 성공한 영주가 된 그는 병든 어머니의 바람으로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죽은 로사 대신 다른 딸을 신붓감으로 얻기 위해 델 바예 가문을 찾은 그는 일생을 사랑하게 되는 클라라와 만나 결혼한다.

 

 

감상

1권

1권을 읽을 때만 해도 할 말이 정말 많았다. 클라라의 신묘한 능력은 실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되어서 곧잘 무시당하는데, 특출 난 재능이 있는 여성을 사회에서 차단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유일하게 일인칭 화자로 등장한다(1권에서는). 클라라의 기록만으로는 누락되는 에스테반의 인생의 사건을 충분하게 서술하고, 그의 모순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상은 타자의 판단과 자신의 판단이 일치할수록 견고하다고 하는데, 이 인간은 지극히 위선적인 인물이다. 창녀촌에 다니고 영지의 젊은 처녀들을 겁탈하면서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한다. 영지 내 소작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도 다 굶어 죽어 가는 마을을 살기 좋게 만들었으니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가 없으면 사람은 폭력적인 일도 자신만만하게 해낸다.

 

2권

2권에 이르러서, 한 가족의 이야기가 국가 전체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군사 쿠데타의 역사는 우리나라 또한 가지고 있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그것을 겪은 세대가 아닌 나로서는 감접 체험이 되었다.

 

에스테반을 증오하고 원망했지만(독자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9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기존의 상식과 체제를 무너트리는 사건을 겪으면서, 인생사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삶이란 바다에서 파도가 칠 때 일어나는 물방울에 불과하다.(<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인용) 

 

에스테반의 손녀 알바는 국가 경찰이 된 소작농의 손자(에스테반 가르시아)의 타깃이 된다. 한밤중에 집에서 끌려가 고문과 강간을 당하고 폭력과 굴욕에 버무려진다. 그러나 자신이 겪은 일을 받아들이고 상대를 용서한다. 이것 또한 시간이 가진 힘이 작용한 탓인지도 모른다.

 

책 속의 문장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증오심마저 사라졌다.(중략) 외할아버지가 강가의 갈대밭에서 그의 할머니인 판차 가르시아를 넘어뜨렸을 때 또 다른 업의 고리가 연결된 것이다. 그 후 강간당한 여자의 손자는 강간한 남자의 손녀에게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고, 아마도 사십 년쯤 후에는 내 손자가 가르시아의 손녀딸을 갈대밭 사이로 넘어뜨리고, 또 다른 고통과 피와 사랑의 역사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복수의 순환고리를 끊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려는 알바의 결심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길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결말이다. 하지만 용서받길 원하는 자가 없는데 용서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왜 가해자는 반성도 안 하는데 피해자는 용서부터 하는 걸까?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가해자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때만 하자.

 

김영하 북클럽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인데, 빠른 전개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한 시대를 살다나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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