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平安) 시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수도를 옮겼을 때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열 때까지, 정치, 문화의 중심이 헤이안쿄에 있었던 약 400년 동안을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의 시작과 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794년부터 1192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헤이안쿄는 지금의 교토로 이어진다.
왕조의 융성
나라 시대 말기의 정쟁 속에 즉위한 고닌(光仁) 천황은 불교 세력을 정치에서 배제하면서 율령 국가의 재건을 도모했다. 고닌 천황의 뒤를 이은 간무 천황도 불교 정치의 불식과 율령 정치 진흥에 힘썼는데, 결정적으로 구 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해 새 수도인 나가오카쿄의 조영에 착수했다. 새 수도의 조영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794년 헤이안쿄 천도로 결실을 맺었다. 또 전 시대부터 계속되던 이민족 에미시의 반란에 대해 적극적인 토벌과 진정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수도 조영과 이민족의 토벌은 재정과 민생에 압박을 가하게 되어 간무 천황에 이어 즉위한 헤이제이 천황은 재정 긴축과 민정 진흥에 노력했다. 다만 그의 반 간무적인 정치 자세가 양위 뒤에도 헤이죠쿄 천도를 사가 천황에게 강요하기에 이르러 이른바 구스코의 난이 일어났다. 이 소동을 극복한 사가 천황은 이후 30년 동안 천황 또는 상황으로 궁중에 군림하며 헤이안 왕조의 기반을 확립했다.
후지와라노씨의 강세
한편 사가 천황의 심복으로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쓰구는 천황가와 인척 관계를 맺어 정계에 대두하기 시작했다. 후유쓰구의 아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도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내 세이와 천황의 외조부가 되어 858년 신하로서는 처음으로 섭정이 되었다. 요시후사의 뒤를 이어 섭정이 된 것은 요시후사의 양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였는데 더구나 모토쓰네는 884년 최초의 관백에 임명되어 후지와라 섭관제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후지와라씨는 정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잇따라 정변을 일으켜 타씨를 배척했다.
897년에 즉위한 다이고 천황에 이어서 즉위한 무라카미 천황은 섭정, 관백을 두지 않고 천황 친정의 의욕을 불태웠으므로, 후지와라씨의 섭관제는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뒤를 이어 즉위한 레이제이 천황은 병약했기 때문에 후지와라노 사네요리가 관백이 되어 섭관제는 다시 시작이 되었다. 좌대신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가 장애가 되었으므로 969년에 안나의 정변을 일을켜 다카아키라를 실각시켰다. 이렇게 해서 후지와라씨의 타씨 배척은 종료되었고 섭정과 관백을 상치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1068년에 즉위한 고산죠 천황은 우다 천황 이래 170년 만에 후지와라씨의 외척이 아닌 자로서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처세는 겨우 5년이었지만, 강력히 추진한 천황 친정은 천황이 권문세가 위에 군림하여 전국을 지배한다는 의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이것을 이어받은 시라카와 천황 친정기에도 조정은 계속해서 천황 중심의 정치를 하여 원정 성립의 바탕을 만들었다.
다이라씨의 대두
이른바 원정은 시라카와 천황이 품고 있던 황위 계승의 구도를 실현할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107년 나이 어린 도바 천황이 황위를 계승하자 시라카와 상황의 집정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원정이라고 해도 특별한 집정 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상황이 정치 기구의 배후에서 지휘하고 결정을 내려 국정을 움직였다. 상황의 손발이 되어 활약한 것은 조정의 중하급 신하들이었다. 그리고 율령 군제가 붕괴되는 가운데 무사를 상황이 거쳐하는 원의 북면에 두는 형태로 무사를 장악하여 정권을 지탱한 것이 원정의 큰 특색이며, 이것을 교묘히 이용해서 급속하게 대두한 것이 다이라씨이다. 이세의 중소 무사단의 수령에 지나지 않았던 다이라노 마사모리는 영지 헌납 등을 매개로 시라카와 천황과 관계를 맺고, 그의 아들 다이라노 다다모리는 북면의 무사를 통솔하는 지위를 획득하여, 도바 원정기에는 유력한 근신의 일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미나모토씨는 집안의 내분과 후계자의 정치적 자질 빈곤으로 다이라씨 못지않은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앙 정계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한편 귀족 사회에서는 전제적인 상황의 집정 아래 이전의 관행이 무시되고 질서는 어지러워졌다. 마침내 황위 계승이 황실과 섭관가의 내분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에 무사를 끌어들여 항쟁하게 되었다.
1156년에 일어난 호겐의 난이 그것이다. 이 난으로 무사의 정치적 입장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특히 미나모토씨가 다메요시, 요시토모 부자의 싸움으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다이라씨는 기요모리를 앞세워 일족이 대거 조정에 진출했다. 더구나 1159년 헤이지의 난으로 미나모토씨의 세력을 수도에서 일소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했다. 다이라씨 정권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던 구 세력은 고시라카와 상황 아래 집결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사원과 신사의 세력은 반 다이라씨적인 행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헤이안 시대에 사원의 속계 진출과 영지 확장 움직임이 격심했는데 그러한 활동을 승병이 앞장서서 했기 때문에 원정 정권은 손을 쓰지 못하고 미나모토씨와 다이라씨의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왕법, 불법의 수호를 표방하는 사원, 신사 세력이 신흥 무사 세력의 정권에 위기감을 고조시켰던 것은 당연하다. 특히 왕성을 버리고 후쿠하라에 천도한 기요모리의 행동은 반 다이라씨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미나모토노 요리코모를 비롯한 각지의 미나모토씨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보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이라씨 정권은 1181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하자 2년 뒤 다이라씨는 수도에서 쫓겨났고 마침내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정권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헤이안쿄에 천도했을 때부터 9세기 말에 섭정 정치가 시작될 때까지 약 100년 동안을 고닌, 죠간기라 하고 그 문화를 고닌, 죠간 문화하고 한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새 수도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하는 율령제의 재건기에 해당하며, 당풍 문화의 최전성기였다. 게다가 천태, 진언 양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화에는 밀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에 비해 10세기 이후 12세기 무렵까지의 문화는 일본적 특색이 강한 문화였다. 894년 견당사가 폐지된 이후 앞서 유입되어 있던 당의 문화를 일본의 고래의 문화에 동화시켜 일본 특유의 문화를 발달시켰던 것이다. 이것을 국풍 문화 또는 후지와라 문화라고 부른다. 이 문화는 전대의 문화에 비해 역동감은 없지만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미적 감각에 특징이 있는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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