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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일본 헤이안 시대 794년 ~ 809년

by 캉쓰 2022.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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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년

헤이안쿄

나라 시기 말기 정쟁 속에서 즉위한 고닌 천황은 불교 세력을 배제하고 율령 정치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이어 즉위한 간무 천황은 고닌 천황의 방침을 계승하는 한편 사원 세력이 강한 헤이죠쿄에서 벗어나 불교 정치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천도 계획을 세웠다. 784년 후지와라노 다네쓰구를 파견하여 나가오카쿄를 조영하게 했으나, 다네쓰구와 세력을 다투며 반목하고 있던 오토모노 쓰구토와 그 일당에 의해 다네쓰구가 암살되면서 사럽을 중지했다. 그 뒤 와케노 기요마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794년 헤이안쿄로 천도했다. 헤이안쿄는 규모가 헤이죠쿄와 거의 비슷한데, 동서 약 4.4km, 남북 4.95km로 헤이죠쿄에 비해 남북으로 조금 길다. 오닌의 난 때 거의 소실되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 부흥하여 오늘의 쿄토시로 이어진다. 794년 천도한 뒤 약 400년 동안 헤이안쿄를 중심으로 정치,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이후 1869년까지 1075년 동안 수도로 존속했다.

고닌, 죠간 문화

 

헤이안쿄에 천도한 이후 9세기 말 섭정과 관백에 의한 정치가 시작될 무렵까지 약 100년 동안을 고닌, 죠간기라고 하고, 이 시기의 문화를 고닌, 죠간 문화라고 한다. 고닌(810~824년), 죠간(859~877년)은 사가 천황 및 세이와 천황의 연호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새 수도에서 새 시대를 열려고 하는 율령제의 재건기에 해당하며, 당문화의 영향을 소화해 냈으며, 새롭게 전래된 천태종과 진언종의 영향으로 밀교적 요소가 강하다.

건축은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자유로운 가람 배치를 한 밀교 사원이 만들어지고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을 덮는 일본풍의 히와다부키도 나타났다. 또 신사의 건축에서는 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대조의 양식이 나타났으며, 조각에서는 통나무 하나를 조각해서 불상을 만드는 양식이 생겨났으며, 회화에서는 만다라를 비롯해 밀교 관계의 신비성을 띤 부화가 그려졌다. 서예에서는 당풍 서체가 성행했고 사가 천황, 승려 구카이, 다치바나노 하야나리는 명필로서 후세에 3필이라 칭했다. 또 당시 학문의 기초로 한문학의 소양이 필요했으며 한시문은 이 시대 귀족의 교양으로 중시되었다.

 

797~809년

가게유시

간무 천황은 즉위 이래 율령 정치를 제건하기 위해 힘썼는데, 특히 지방 정치의쇄신에 주력했다. 나라 시대 중기 이후 수가 늘어난 정원 외의 고쿠시나 군지를 폐지하고 또 797년 영에 규정이 없는 영외관으로 가게유시를 새롭게 설치했다. 가게유시는 고쿠시 교체시 인수 인계가 잘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해유장을 조사하는 관직이다. 가게유시를 설치한 이유는 고쿠시의 부정이나 태만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장된 곡식을 횡력하여 부정 축재하거나, 저장돼 있어야할 곡식이 부족분을 방치하거나, 또 조세 징수를 게을리하곤 했기 때문이다. 전임 고쿠시는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로 보고하고 해유장을 받으려고 했다. 한편 신임 고쿠시는 교체 후 부정이 발각되면 사재를 털어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쉽게 해유장을 발행하지 않았다. 고쿠시의 교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가게유시가 설치된 것이다.

 

 

사이쵸

767~822년. 헤이안 초기 천태종을 개종한 승려. 오미 사람으로 785년 도다이사에서 수계하고 19세 때 히에이 산으로 올라가 암자를 짓고 수행 생황을 했다. 804년 전당사를 따라 임당하여 천태종의 교의, 계율, 선을 배우고 다음 해에 많은 경전을 가지고 귀국했다. 히에이 산의 엔랴쿠사에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독자적인 천태종을 열었다. 천태 승려가 지켜야 할 규정인 [산가학생식]을 지어 대승 계단의 설립을 간청했으나, 나라의 불교 종파들이 모두 반대해서 허가를 받지 못했다. 사이쵸는 [한계론]을 써서 반론을 제기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계단 설립은 실현하지 못했다. 대승 계단의 설립은 그가 사망한 직후인 822년 제자들의 노력과 후지와라노 후유쓰구의 원로 천황의 칙허를 받았다.

 

구카이

774~835년. 헤이안 초기 진언종을 개종한 승려. 구카이는 사누키의 호족 아들로 처음에는 대학에 들어갔으나 불교에 매료되어 시고쿠의 험난한 곳을 다니며 고행을 거듭했다. 797년 [산교지귀]를 저술하여 유, 불, 도, 삼교의 우열을 논하고 불교가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결론 짓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804년 사이쵸와 함께 겨당사를 따라 입당하여 밀교를 배우고 806년 밀교의 도상과 경전을 가지고 귀국했다. 사가 천황의 후원으로 고야 산에 곤고부사를 세우고 진언종을 열었다. 진언종은 대일여래를 교조로 하며 밀교라고도 한다. 밀교는 석가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배우고 수행을 쌓아 깨달음에 이르는 현교와는 달리, 비밀의 주문법으로 부처의 세계에 접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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